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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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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월 개인지방·종합소득세 신고·납부기간 운영

양산시,월 개인지방·종합소득세 신고·납부기간 운영

- 양산시청·양산세무서와 합동신고센터 운영 - 양산시는 5월 한달 간 개인지방소득세와 종합소득세 신고·납부의 달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납세자는 2023년 귀속 종합소득이 있는 자이며 5월 31일까지 국세인 종합소득세는 홈택스나 손택스로, 지방세인 개인지방소득세는 위택스로 전자신고할 수 있다. 전자신고가 어려운 납세자(‘모두채움’대상자에 한함)는 지방세와 국세를 동시에 오프라인으로 신고할 수 있는 합동신고센터를 양산비즈니스센터 1층, 양산세무서, 웅상출장소(5.22.~5.31.)에서 운영하므로 신분증과 모두채움 안내문을 지참하면 신고할 수 있다. 또 모두채움 안내문을 받은 자 중 수정사항이 없는 경우, 종합소득세는 전화(ARS)·홈택스 등으로 신고하고 개인지방소득세는 안내문에 기재된 가상계좌로 납부하면 별도의 신고 절차 없이 납기 내 신고·납부 한 것으로 인정된다. 시는 납부할 세액이 100만원을 초과하면 분할납부 신청이 가능하게 하고소규모 자영업자 및 수출기업인을 대상으로 납부기한을 9월 2일까지 직권연장하는 등 납세편의도 제공할 예정이다. 양산시 관계자는 “지방소득세를 매년 성실히 납부해 주시는 납세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5월 개인지방소득세도 잊지말고 납기 내 신고·납부해 주실 것을 당부드린다”며 “앞으로도 시민들의 납세편의를 위한 다양한 세정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양산시 5월1일 포토한줄뉴스

양산시 5월1일 포토한줄뉴스

양산시, 맞춤형 적극행정 온라인 교육 실시 - 창업기업·투자자 만남의 장 ‘IR데이 및 투자상담회’ - 양산시립박물관, ‘어린이날 한마당 잔치’ 개최 양산시립박물관, ‘어린이날 한마당 잔치’ 개최 - 가족이 함께 즐기는 다채로운 체험행사 마련 - 양산시립박물관(관장 신용철)은 어린이날을 맞아 오는 5일 박물관 일원에서 ‘2024년 어린이날 한마당 잔치’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박물관을 찾은 어린이가 가족들과 함께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페이스 페인팅, 클레이 아트 만들기, 꿀벌 바람개비 만들기, 인형극 관람, 전통 놀이 체험 등 오감으로 즐기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했다. 행사는 어린이날인 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박물관을 찾은 어린이 관람객이면 누구나 사전 예약 없이 선착순으로 재료 소진시까지 현장 참여가 가능하다. 시립박물관 관계자는 “가정의 달과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온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며 “가족과 함께 박물관 전시 문화유산도 관람하고, 전통놀이 체험도 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달 25일 개막한 시립박물관 상반기 특별기획전인 『梁山 郡守(양산 군수)』전도 성황리에 열리고 있으므로, 어린이와 함께 전시실을 방문하여 조선시대 우리 고장 양산에서 활약한 명망 있는 지방행정가였던 군수들의 업적과 자취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져 볼 수 있다. 행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양산시립박물관 홈페이지나 박물관 운영팀(☎055-392-3311~4)으로 문의하면 된다. - 세상에 이런 맛이, 삼성동 찾아가는 행복보따리 행사 세상에 이런 맛이, 삼성동 찾아가는 행복보따리 행사 - 10여년째 아름다운 나눔으로 행복배달 - 양산시 중앙동 소재 ‘세상에 이런 맛이’(대표 김은준)는 1일 삼성동 새롬마을, 대동빌라트 마을 경로당을 방문해‘찾아가는 행복보따리’행사를 실시했다. 찾아가는 행복보따리 사업은 각 마을 경로당을 직접 찾아가 레크레이션, 노래교실 등 문화체험 뿐만 아니라 만두, 찐빵 등 음식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는기회를 제공해 어르신들의 건강과 행복을 도모하고자 마련됐다. 어르신들이 만두를 직접 빚는 시간을 가졌으며, 만두를 찌는 동안 민요가수의 노래 재능기부로 한층 더 흥겨운 시간을 선사했다. 행사에 참여한 어르신은“직접 만들어서 만두도 정말 맛있고, 신나는노래를 이렇게 가까이서 들으니 행복하다”고 전했다. 이성미 삼성동장은 “어르신들을 위해 손수 재료 준비와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봉사활동을 10여년째 하고 계시는 김은준 대표님께 매우 감사드린다”며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어르신들께는 건강한 노후를 응원하고, 웃음 가득한 행복보따리가 전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말했다.

화랑 관창의 장렬한 최후

화랑 관창의 장렬한 최후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황산벌로 진군한 화랑 관창이 거쳐간 곳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장군,품일(品日),김유신 장군의 동생 흠춘(欽春)이 각각 황산[(黃山:지금의 연산(連山))으로 진군할 때 품일은 아들 관창(官昌)을 데리고 이곳 금성산 낙화대(落花臺)에서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며칠 뒤 관창은 백제의 계백(階伯)장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670년(문무왕10)이곳 사람들이 낙화대 뒤에 있던 절을 중수해서 품관사(品官寺)라 하고,그 산을 품관산이라 불렀다고 한다.당시 이곳의 지명은 길동(吉同)이었는데 경덕왕 때 영동군으로 고치고 상주에 예속시켰으며,황간(黃澗)과 양산을 영현으로 두었다.황간은 본래 소라현(召羅縣)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때 황간이라고 고쳤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에는 부용리가 있다.부용리 고개에서 국도를 따라 대전 방향으로 가다 보면‘낙화대’라는 암벽을 만날 수 있었다.이 암벽은 뾰족하고 길게 튀어나온 형상이었으며,옆에는 고목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낙화대에 올라서면 소백산의 봉우리와 영동천의 장관을 바라볼 수 있었다.그러나 낙화대는1993년5월부터1999년3월까지 진행된 영동-대전 간 도로 확장 공사 구역으로 편입되어 현재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낙화대는‘꽃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을 지니며,이에 관한 한 기생의 애틋한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2.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화랑 신라의 이름 높은 스님이었던 원광이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가실사(加悉寺)에 머무르고 있을 때,소년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찾아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교훈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다.이에 원광이5가지 계율을 말해 주면서,불교 승려가 지켜야 하는 보살계(菩薩戒)와 구분하여 세속 오계라 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우리역사넷). 화랑도의 세속 오계는 다음과 같다.첫째,충심으로 왕을 섬긴다[사군이충(事君以忠)].둘째,효로써 부모를 섬긴다[사친이효(事親以孝)].셋째,신의로써 친구를 사귄다[교우이신(交友以信)].넷째,전쟁에 나가서 물러서지 않는다[임전무퇴(臨戰無退)].다섯째,살아 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한다[살생유택(殺生有擇)].역사에 이름을 남긴 신라의 화랑도는 많이 있다.충북 영동의 백제 조천성 공격에서 전사한 김흠운(金歆運)도 대표적인 화랑이다. 사관이 논평한다.신라인은 인재를 알아 볼 방법이 없음을 근심하여,무리지어 함께 노닐도록 하고 그 행동거지와 의리를 살핀 후에 등용하고자 하였다.드디어 용모가 뛰어난 남자를 뽑아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 짓고 그들을 받드니,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혹은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김에 멀더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삼국사기 제47권 열전 제7). 이로 인하여 그 사람됨의 악함과 바름을 알게 되어,선량한 이를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이“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이로부터 나왔고,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겼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3대의 화랑이 무려2백여 명이나 되었는데,그들의 꽃다운 이름과 아름다운 사적은 전기에 실려 있는 바와 같다.흠운 같은 이도 역시 낭도로서 나라 일에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니,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화랑 관창 역시 화랑도의 표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김유신 장군이 이끄는5만 명의 신라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백제의 계백 장군이 지휘하는5천 명의 결사대를 만나 네 번의 전투에서 연달아 패배하였다.위기에 봉착한 김유신 장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하여 화랑도를 이용하였다.신라의 지배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에 투철하였다.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귀족은 의무를 진다”는 뜻의 프랑스어 표현이다. 가을7월9일,유신 등이 황산(黃山)들판으로 진군하였다.백제의 장군 계백(階伯)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유신 등은 병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장수와 병졸들의 힘이 다하였을 무렵,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태종왕(太宗王),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신하에게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에게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이렇게 위급할 때에 목숨을 바친다면 충과 효 두 가지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반굴이 말하였다. “삼가 분부를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곧장 적진에 뛰어들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장군 김흠순은 김서현(金舒玄)의 장군 아들이며,김유신(金庾信)장군의 동생이다. ‘흠춘(欽春)’이라고도 한다.어려서 화랑이 되어 인덕과 신의가 깊어 크게 존경을 받았다. 660년(태종무열왕7) 6월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품일(品日)과 함께 김유신을 도와 계백(階伯)의 백제군과 황산(黃山)에서 결전을 벌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민족대백과사전).화랑 반굴의 큰아버지가 총사령관인 김유신 장군이었다. 3.화랑 관창의 희생 관창(官昌)[혹은 관장(官狀)이라고도 한다.]은 신라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용모가 우아하였으며 젊어서 화랑이 되었는데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16세에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하여 어떤 대감이 그를 태종대왕에게 천거하였다(관창(官昌),삼국사기 제47권 열전 제7). 당 현경(顯慶) 5년 경신(서기660)에 왕이 군대를 내어 당나라 장군과 함께 백제를 치는데,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황산벌에 이르러 양쪽 병사가 대치하였는데 아버지 품일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뜻과 기개가 있다.오늘이야말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가 없을쏘냐?” 관창은“그렇습니다.”라 하고,즉시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바로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여러 사람을 죽였다.그러나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의 원수(元帥)계백(階伯)의 앞으로 끌려갔다.계백이 그의 투구를 벗기고 그가 어린 나이인데도 용맹한 것을 애틋하게 여겨,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빼어난 인물이 많구나.소년조차 이러하거늘 장사들이야 어떻겠는가?” 이에 관창을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관창이 돌아와서 말했다.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지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입하여 맹렬하게 싸웠다.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고는 그의 말 안장에 매달아 보냈다.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닦아주며 말했다. “내 아들의 얼굴 모습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나랏일을 위해 죽었으니 후회가 없으리.” 전군이 그 광경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뜻을 다지고는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니,백제가 크게 패하였다.대왕이 급찬의 직위를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으며,그 가족들에게 당나라 비단30필과 이십승포30필,곡식1백 섬을 부의로 주었다. 계백 장군은 의자왕이 충신인 성충,흥수의 직언을 듣지 않고 간신들의 아첨에 취해 정치를 잘못하여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초래한 상황에서 백제가 멸망할 것을 예견하였다.가족이 패전 후 치욕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출전하였다.황산벌에서 지형적으로 유리한 세 곳에 군사를 배치하고 용감하게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였다.초기 네 번의 전투에서 이겼지만 신라 화랑인 반굴과 관창의 희생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을 막지 못했다. 4.화랑 관창의 역사 유적지 답사 소감 1364년 전 김유신 장군의5만 군사와 계백 장군의 결사대5천 장병이 최후의 격돌을 펼친 황산벌 전투는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전투 과정 자체가 극적이고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이어져 역사를 배운 국민에게 비장미와 슬픔을 안겨주었다. 일기당천(一騎當千)이라는 고사성어는 한 명의 기병이 천 명의 병사를 상대해서 이긴다는 의미이다.일당백(一當百)은 한 명이 백 명을 당해낸다는 뜻으로 매우 용감한 병사를 말한다.객관적인 숫자로 볼 때 백제 군사 한 명이 신라 군사10명을 상대해서 이겨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으로 승리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준익 영화감독이2003년‘황산벌’이라는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황산벌 전투를 영화로 만들어 박중훈,정진영,이문식,류승수 등의 배우가 열연함으로써2,771,236명의 관중을 동원하여 히트했다. 처음에는 역사를 배경으로 한 평범한 코미디,혹은 적당한 수위의 블랙 코미디 정도로나 받아들였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고 개그 뒤에 숨겨진 진지한 메시지와 기존 사극의 클리셰(프랑스어로 지겹고 예측 가능한 뻔한 설정,표현)를 비튼 점들이 재조명되면서 한국 코미디 영화와 사극 영화의 역사에 남을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필자는 황산벌 전투 현장의 역사 유적을 답사하기 위해 충남 논산시를 방문하였다.처음에 황산벌이라는 뜻이 넓은 들판을 의미하기에 넓은 평야 지대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거라는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었다.막상 현장에 가보니 허허벌판은 아니고 산자락을 끼고 있는 들판이었다.계백 장군이 지휘하는 백제군은 방어하기 쉬운 산성 중심으로 진영을 펼치고 있었다.물론 산성은 아주 높은 산이 아니고 벌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지대로 추정되었다. 황산대첩비가 설치된 곳은 산자락 아래에 있는 마을이었다.황산벌이라고 알려진 동네는 신양리와 신암리였는데,산자락 아래 마을이었다.신양리에는 자연부락인 황산리가 있었고,황산대첩비도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신양리에서 가까운 높은 산은 해발394m의 깃대봉이었고,신암리에서 가까운 산은 해발404.4m의 함박봉이었다. 황산마을 주민에게 황산대첩비 위치를 물어보니 알려주었다.황산대첩비가 있는 곳은‘연산황산벌오토캠핑장’바로 앞의 도로변이었다.캠핑장에는 작은 장군 인물상이 있었다.캠핑장에서 근무하는 젊은 직원에게 황산벌 전투와 계백 장군에 대해 물어보니 아무 것도 몰랐다.캠핑장의 작은 장군상이 계백 장군을 모델로 해서 만들었다는 것도 몰랐다. 지도상으로 살펴보니 황산벌 전투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인 충남 논산시 양촌면 황산벌로1040에 국방대학교가 있었다.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육군 논산훈련소도 논산시에 있어 황산벌 전투 이후 거의1400여 년이 지나도 논산시는 여전히 국방의 요충지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였다. 황산벌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운 장군의 아들인 화랑 관창이 죽은 곳인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를 주민의 정보 제공에 의해 알게 된 것은 현장 답사의 큰 수확이었다.관동리는 옛날에 관창리로 불리다가 관동리로 지명이 바뀌었다고 한다.도로명 주소에 황산벌로,계백로,관동로 등 황산벌 전투와 연관된 것이 있어 논산시민들은 백제인 후예답게 역사를 잊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상도박사, 화요칼럼,황산벌 전투의 현장 황산성

심상도박사, 화요칼럼,황산벌 전투의 현장 황산성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연산면 관동리와 가까운 황산성 황산성(黃山城)은 충남 논산시 연산면 표정리 산20에 있다.관동리는 백제의 계백 장군의5천 명의 결사대와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5만 명의 신라군이 격돌한 전투 현장 중의 하나이다. 16세의 어린 화랑 관창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다.관동리라는 지명이 관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동네 사람들은 관창이 여기에서 죽었기 때문에 관창골이라고 부른다. 황산성은 논산과 연산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해발386m의 함지봉(咸芝峰)정상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산봉우리에 테를 두른 듯이 쌓은 산성)이다.황성(黃城)으로도 불리는 황산성은 서쪽으로 노성산성과 일직선을 이루며,동쪽으로 황령산성에서 모촌리산성으로 이어지는 백제시대 사비성 부여의 최후 방어선이다.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하였으나 북서쪽으로 멀리 바라다보이는 노성산성(魯城山城)이 산봉으로 가로막혔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북문터에서300m쯤 북쪽 산봉우리에 작은 보루를 두었던 흔적이 있다.동쪽과 서남쪽으로 주변 가까이 산성들이 있고,특히 동남쪽의 평야지대는 백제멸망 당시 큰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판이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산성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성은 황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마름모꼴 형태로 자리를 잡았는데,지형에 따라 편축식(片築式:성의 바깥쪽만 쌓는 방식)과 협축식(夾築式:성의 안팎을 다 쌓는 방식)을 혼용하여 축조되었다.자연들을 깨서 사용하였으나 일부는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개·보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높이는 서쪽2m,동쪽1.8m이고,산성의 둘레는870m이며,높은 북쪽 봉우리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였다.『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성황산석성(城隍山石城),『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북산성(北山城)이라 하였다.아울러 성벽의 둘레는1,740척,혹은493보였으며,높이는12척이고,성내에는 우물1개소와 군창(軍倉)이 있었던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디지털논산문화대전). 황산성은 성벽 전체를 돌로 쌓은 석성으로,황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마름모꼴의 형태로 자리하고 있는데 지형에 따라 편축식과 협축식을 혼용하여 축조하였다.축성에 사용된 돌은 부정형 할석과 방형,장방형으로 다듬은 것들이 있는데,이는 후대에 개·보수한 결과로 보인다. 성벽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데,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높이2m에 이르는 구간도 있다.부대시설로는 문지3개소와 건물지4개소,장대지1개소,우물터1곳 등이 있다.기록에는 우물터1개소와 군창(軍倉)이 있었던 사실만 전하나,실제로는 더 많은 부대시설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지는 동벽,서벽,남벽에서 확인되었으며,남문지 안쪽으로는 가장 큰 건물지가 자리하고 있다.성내에서는 연화문 와당과 인장와(印章瓦)를 비롯한 다양한 기와와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대체로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성 안에서 출토된‘황산인방(黃山寅方)’이라는 기와를 근거로 백제 오방성(五方城)중 득안성(得安城)으로 추정되기도 한다.여러 곳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특히‘대안원년(大安元年)’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은1209년(고려 희종5)의 것으로 보아 황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성터였음을 알 수 있다. 논산시에서 대전광역시로 통하는 국도4호선을 타고10㎞쯤 가면 연산면 소재지인 연산리에 이른다.여기에서 북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호남선 철도를 건너면 관동리 행교골에 닿는데,이 행교골의 뒷산이 황산이다.행교골에서 황산에 이르는 길은 길이 잘 나 있는 편이며,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성의 남벽에 닿는다. 2.황산성 복원 염원비(黃山城 復原 念願碑) 필자는2023년11월23일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황산성을 답사하였다.화랑 관창이 죽은 연산면 관동리 현장을 방문하였다가 동네 주민을 만나 물어보니 황산성으로 차가 갈 수 있고 주차장도 있다는 말을 듣고 골짜기를 지나 올라갔다.황산성 입구에 안내판과 황산성 복원 염원비가 설치되어 있어 감동받았다. 백제가 신라군에 패배하여 망국의 길로 접어든 황산벌 전투 현장을 주민들이 잊지 않고 중요한 역사 유적인 황산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염원이 결실을 맺은 것으로 보여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복원 염원비를 읽어보니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백제군과 신라군을 모두 추모하는 내용이어서 더욱 감명깊었다.비문 내용과 유적 복원에 앞선 인사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서기660년 여름 삼한일통(三韓一統)을 꿈꾸는 신라군이 백제로 짓쳐들어왔다.신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5만 대군에 맞서 백제는 계백 대장군의5천 결사대로 하여금 이를 저지케 했다. 오로지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의(忠議)의 깃발 아래 결사 항전에 나선 계백의5천 결사대는 신라 김유신 군(軍)과 맞서 네 번의 싸움에서 이기고도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다섯 번째 마지막 전투에서 패해 이곳 황산벌의 산중고혼(山中孤魂)이 되었다. 그 후1400여 년이 흐르도록5천 결사대 젊은 영웅들의 숨결은 이곳 황산성(山城)에 머물러 돌아보는 이 없이 천년 설움을 솔숲 소리로 토해내니 대를 물린 후인(後人)들의 가슴은 아프고 처절하다. 이에 우리 연산면의 뜻있는 후인(後人)들이 황산성복원회(黃山城復原會)결성하고 십시일반(十一飯)의 뜻을 모아 민간 복원 기금을 모금하는 등 황산성(黃山城)복원(復原)의 간절한 염원(金)을 드러내 밝히니 충청남도가 화담(和答)하고 논산시가 호응(好應)해서 마침내 황산성(黃山城)복원(復原)사업을 시작(始作)했다.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바라거니와 계백 장군의 웅혼(魂)한 지략(知略)이 피어올랐던 황산성(山城)복원(原)하고 나라를 위한 충의(忠義)의 넋으로 화(化)한 백제의5천 결사대와 천리 먼 길 나서 순국혼(殉國魂)으로 화한 신라군 전몰(戰歿)장병들의 외로운 넋을 위령(慰靈)하는 합동(合同)위령비(慰靈碑)를 건립하여 자랑스러운 이 논산(論山)우리 연산(山)땅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호국(護國)의 성역(聖域)으로 길이 일컬어지기를 염원(願)하여 황산성복원회(黃山城復原會)의 이름으로 이 비를 세우노라. 서기2022년12월 일 황산성 복원회장:도기정 회원:강기애,강정숙,곽도영,김만중,김명화,김선원,김의현,김중식,김태원,류진선,박민자,박지연,박현배,안종명,오인호,이순봉,이영숙,이우원,이준행,이창구,이충렬,이태경,전선희,정규태,주재순,최창열,홍만기. 3.황산성 답사 소감 백제의 최후를 장식한 계백 장군이 이끄는5천 명의 결사대의 항전은 언제 들어도 비장한 느낌이 든다.백제 의자왕의 사치와 향락,실정으로 국정은 기울고 있을 때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였다.의자왕은 성충,흥수 등 충신의 간언을 멀리 하고 아첨하는 신하들만 가까이하여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계백 장군은 꺼져가는 백제의 불꽃을 마지막으로 타오르게 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여 만고의 충신으로 자리매김하였다.백제인의 충절과 기백을 보여준 계백 장군은 영원히 역사적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황산벌 전투도 거의1400여 년 가까이 오래전 일이 되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론이 분분하다.현지 주민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기 때문에 역사학자들보다 오히려 정확하게 볼 수도 있다.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곳은 신양리,신암리 마을로 전해지고 있다.신암리 마을회관을 방문하여 주민들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사람이 없었다.마을 길을 걸어가면서 멀리 보니 주민이 밭에서 일하고 있어 논두렁을 가로질러가 인사를 하였다.밭에서 김장용 무를 뽑고 있었다.황산벌 전투에 대해 질문하였다. 87세 이기병 씨는 황산벌 전투에 대해 여러 가지 중요한 정보를 알려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화랑 관창이 죽은 장소를 알려주었는데,연산면 관동리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또한 신라군은 세 방면으로 진격해왔다고 설명하였다.신라군이 진격한 곳은 황룡리의 용처럼 생긴 황령고개,명암리 양경고개,국사봉 등이었다.중요한 정보를 알려준 데 대하여 감사 인사를 하고 화랑 관창이 죽은 관동리로 향했다. 관동교라는 다리를 지나 관동리 새마을 회관 겸 노인회관을 사진 찍고 마을 안쪽으로 계속 들어갔다.도로 옆의 밭에서 일하는 주민을 만나 화랑 관창에 대해 물어보았다. 77세의 도민선 씨는 황산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황산성 입구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도민선 씨는 황산성을 관저골이라 불렀다고 하였다.군사 요충지인 황산성에 주둔한 관리의 주거지인 관저가 있었다고 하였다. 오후 시간이라 황산성으로 걸어갔다 오기에는 늦었지만 차로 갈 수 있다는 말에 올라가 보기로 하였다.주차장에 도착하여 조금 올라가니 황산성의 성벽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성안에 물이 고여 있는 큰 우물도 남아 있었다.성벽을 따라 올라가는 등산로에는 영산홍,철쭉 등을 심어 놓았고 정자,벤치도 있었다.성벽은 현재 복원 공사 중으로 성벽 돌이 무너져 내린 곳이 보였다. 정상에 올라가니 향적산(국사봉)까지8.2km,주차장430m라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었다.쉼터와 정자도 있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주변은 철쭉,영산홍을 심어 놓아 주민들이 잘 관리하는 느낌이 들었다.황산벌,비닐하우스,강 등이 내려다 보여 조망이 좋았다.쉼터 주변에는 기왓장이 많이 흩어져 있어 건물이 설치되었던 흔적이 드러났다.황산성을 내려가는 등산로는 가팔라 밧줄이 설치되었고,성벽 돌도 보였다. 황산성을 일주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왔을 때 등산로에 까만 산양 한 마리가 나타났다.멀리서 사진을 찍었는데 도망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황산벌 전투에서 순국한 백제 군사가 산양으로 환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선한 눈망울을 지닌 산양은 천천히 필자가 내려온 황산성 정상 쪽으로 올라갔다.황산성은 당초 답사 계획에 없었지만 운 좋게 주민 잘 만난 덕분에 살펴볼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숲애(愛)서(徐) 상반기 웰니스 힐링캠프 참가자 모집

숲애(愛)서(徐) 상반기 웰니스 힐링캠프 참가자 모집

- 오는 5월 25일부터 26일까지, 치유프로그램 3종 등 다양한 체험 - 양산시시설관리공단(이사장 박성관) 숲애(愛)서(徐)에서 대사질환에 관심있는 참가자를 위한 ‘2024 상반기 웰니스 힐링캠프’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이번 캠프는 오는 5월 25일부터 26일까지 1박 2일로 운영되며, △숲속의 객실 1박, △치유식사 2식, △대사질환 특강, △산림치유, 양산꽃차 티 테라피 등 치유프로그램 3종을 포함하며 그 외에도 열치유실(찜질방), 수치유실(목욕탕)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으며, 건강관리를 위한 기념품도 제공할 예정이다. 참가대상은 만30세 ~ 만65세 미만의 대사질환에 관심있는 사람으로 양산시민을 우선으로 모집하며, 참가비용은 체험, 식사, 숙박을 모두 포함하여 1인실 9만원, 2인실 16만원, 4인실 30만원으로 신청기한은 오는 5월 15일까지 숲애서 누리집을 통해 온라인 예약 선착순 접수를 진행한다. (http://www.yssisul.or.kr/forest) 한편, ‘숲애서’는 작년에 이어 2024-2025년에도 ▲한국관광공사 선정 추천 웰니스관광지에 선정되었으며, ▲경남도 최초 산림청 산림교육센터 지정, ▲경남교육청 교육연수원 특수분야 연수기관 지정, ▲경남관광재단 선정 경남 대표 웰니스 관광지에 선정되어 전국을 대표하는 치유전문시설로 거듭나고 있다.

심상도박사,오늘의뉴스 양산차인연합회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 답사

심상도박사,오늘의뉴스 양산차인연합회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 답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차(茶)로 이어진 역사의 숨결’행사 소개 법기도자차문화원 이지안 원장이 인솔한 양산차인연합회 회원15명이4월21일10시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 답사에 참가하였다. ‘차로 이어진 역사의 숨결’프로그램은 총4차에 걸쳐 진행된다. ‘4월21일 다방동 야생차 군락지’라는 주제로 열린 첫 번째 행사였다. 4월28일‘양산차 이야기(조국영 도예가)’, ‘5월12일 효충사 헌다제’, ‘5월18일 무아차회’(물금읍 워터 파크)로 행사는 이어진다. 행사 주관은 양산차인연합회,협력은 양산차(茶)문화원,법기도자차(茶)문화원,문화교육연구소田,박순희茶문화연구소,국악예술단뫼올,천호차(茶)회,달방아.행사 연락과 진행은 법기도자차문화원 이지안 원장이 담당하였다. ‘다방동 야생차 군락지’는 양산숲길보전회 회장으로서 군락지를 관리해온 필자가 안내와 해설을 맡았다.행사 전날인 토요일에 비가 많이 왔고,행사 날인 일요일에도 비가 예보되어 걱정이 많았다.특히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는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현장 답사를 통해 눈으로 확인하고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다행하게도 비가 오지 않아 행사는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필자는 사전에 준비한 특강 자료인‘다방동의 야생차나무 군락지와 음다문화(飮茶文化)’를 배부하고 설명하였다.다방동의 야생차나무 군락지는 매우 중요한 생태자원이므로 잘 보호하고 향토자원으로서 활용가치가 매우 크다는 것을 강조하였다.간단한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고 동산장성 둘레길 다방분기점을 통해 야생차나무 군락지로 이동하였다. 행사 전날에 비가 많이 왔으나 등산로가 미끄럽지 않아서 다행이었다.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에 도착하여 차나무의 특성을 해설하고 그동안 칡덩굴 제거,신우대 제거한 현황을 설명하였다.이지안 원장이 준비한 차를 다방동 다신(茶神)에게 올리는 간략한 헌다(獻茶)행사를 하였다.군락지를 돌면서 차나무 구경을 하고 행사를 마무리하였다. 2.다방동의 지명 유래와 해결 과제 대규모 차나무 군락지가 있는 양산의 다방동은 조선총독부가1914년3월1일 시행한 부군면 통폐합(府郡面 統廢合)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 때 명칭이 바뀌었다.다방동은 본래 양산군 읍내면에 속해 다방리(茶房里)라고 불렸으며,다방동(多芳洞)이라고 변경하였다. 1918년 읍내면이 개칭된 양산면에 속하였다. 다방동은 차나무가 많은 곳으로 마을 이름을 차 다(茶),집 방(房)으로 다방(茶房)이라고 하였는데, ‘많을 다(多)’, ‘꽃다울 방(芳)’으로 다방(多芳)이라 개칭하였다.원래의 고유한 명칭인 다방동(茶房洞)으로 변경하는 게 마땅하다.다방동의 수령이 오래된 고차수는 밑동 지름이23cm이다. 향기가 많은 마을이라는 의미인데 차 향기와 연관 지을 수 있으나 본래의 차(茶)라는 의미는 소멸되었다.총독부가 우리의 고유 문화를 말살하고 파괴하는 차원에서 마을 이름을 바꾼 것으로 유추된다.자연 마을로는 다방마을과 금촌마을이 있으며,주요 지명으로는 다방삼거리,당절,승방골,주막거리,칠산,황산,차밭골,패총터,신강만리 등이 있다. 다방동이라는 행정구역 명칭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지역 차나무의 전통,문화,생태자원을 살려야 한다.양산의 야생차 군락지인 우불산,다방동,물금읍 증산 등의 차나무를 활용하여 지역의 향토산업을 육성하고 관광자원화 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하겠다. 특히 수령이100년 이상 된 귀중한 야생차나무 보호 대책의 수립,안내판 설치가 시급한 실정이다.특히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 면적은3천~4천 평의 대규모로 보존 가치가 크므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군락지 대부분이 사유지이므로 양산시에서 연차적으로 매입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3.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 환경정화 활동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는 칡덩굴로 뒤덮이고,그 위에 낙엽이 쌓여 차나무가 억눌려 있었다.양산숲길보전회 회장인 필자는2019년부터 회원들과 칡덩굴을 제거해왔다. 2023년1월~3월 중 필자 혼자30일 정도 칡덩굴 제거작업을 꾸준히 하였다.이기천 회원은4일간 동참하였다. 1월8일에는 법기도자차문화원 회원7명(이지안 회장),양산숲길보전회 조상현 사무국장,필자가 함께 칡덩굴 제거작업을 하였다. 2월26일에는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이 차나무 살리기에 나섰다.차나무 군락지로 침투하는 신우대도 일부 제거하여 차나무 서식지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필자는 다방동에서 차 씨앗을 계속 수집하여3일 동안 물에 불린 후 군락지에 식재하였다. 필자는3월13일 양산차문화연구소 지미리 소장과 함께 씨앗100개, 3월22일 공유신 시의원,양산시 산림과 김철환 산림방재팀장과 함께77개, 3월26일 양산숲길보전회 이다겸 재무,이해령 회원과 함께 씨앗84개를 심었다. 필자는2024년1월1일부터1월3일까지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에서 환경정화 활동을 하였다. 1월5일~6, 7일~8일, 10일에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 1월14일~14일, 17일, 1월19일~27일까지 환경정화 활동을 하였다. 19일 강동환 회원 동참, 21일에는 호미,낫,쇠스랑을 갖고 동참하였다. 1월28일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과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에서 환경정화 활동 후 헌다제를 개최하였다.김숙희 예다회 회장이 차를 준비하였다.조국영 도예가가 축문을 준비하고 헌다제를 진행하였다.헌다제에 양산 갑지구 국회의원 후보자 이재영 기모란 부부,신재향 양산시의원이 참석하여 신우대 제거 봉사활동을 하고 다방동 다신에게 차를 올렸다. 필자는1월31일~2월3일까지 다방동에서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 2월6일, 8일~13일까지 다방동에서 환경정화 활동을 하였다. 2월16일~19일까지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 3월14일~15일, 19일에도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 4월13일부터19일까지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에서 칡덩굴 제거,신우대와 뿌리를 제거하는 봉사활동을 하였다.앞으로도 소중한 생태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환경정화 활동을 해나갈 예정이다.

심상도박사,화요칼럼, 화랑도가 이름을 남긴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

심상도박사,화요칼럼,  화랑도가 이름을 남긴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울주 천전리 각석 이름 변경     국보인 ‘울주 천전리 각

화랑도가 이름을 남긴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울주 천전리 각석 이름 변경 국보인‘울주 천전리 각석’의 이름이 변경되었다.문화재청은 지난2월28일부터‘울주 천전리 각석’의 명칭을‘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蔚州 川前里 銘文과岩刻畫)’로 바꾼다고2월26일 밝혔다(연합뉴스, 2024, 2.26.).문화재청에서는1973년 국보 지정 당시에는 돌에 글과 그림을 새겼다는 의미로‘각석(刻石)’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산의 특징과 가치를 온전히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명문(금속이나 돌 등에 새긴 글)의 학술적 가치와 암각화의 중요성을 모두 담은 이름으로 바꾸게 됐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문화재청은 이름을 바꾼 천전리 각석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포함한‘반구천의 암각화’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신청서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한 상태이다. 울산광역시가 신라시대 진흥왕과 화랑의 흔적이 있는 국보‘울주 천전리 각석’명칭 변경을 추진한다.울산광역시는 문화재 자료 검토와 전문가 자문을 거친 뒤 문화재청에 명칭 변경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지난7월7일 밝혔다.지난6월 시는 문화재위원회를 열고 천전리 각석 명칭을 천전리 암각화로 변경하는 안을 가결했다(매일경제, 2023, 7.7.). 그동안 학계에서는 울주 천전리 각석은 신라시대 글자 외에도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다양한 바위 그림이 있기 때문에 포괄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암각화’로 명칭을 바꾸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됐다. 특히 울산시가 추진 중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 명칭이‘반구천 일원 암각화’로 두 유산의 명칭을 통일해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전문가 권고도 있었다.시는 국보 명칭 변경을 위해7월11일 강봉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등이 참석하는 학술 토론회도 개최하였다. 지난3월20일에 현장에 가보니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안내판도 문화재청과 울주군에서 새것으로 교체하지 않고 임시방편으로 붙인 변경된 명칭이 떨어져 관리인이 손으로 눌러 다시 붙이기도 했다.사진 찍기 위해 바위 앞의 경계를 넘어가면 자동 인식으로 방송이 나왔다.필자 옆에서 사진 찍던 한 여성이 자꾸 들락날락하니 관리인이 현장에 와서 심하게 나무랐다. 2.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의 중요성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2에 있는‘울주 천전리 각석’은1973년5월4일 국보로 지정되었다.태화강 물줄기인 대곡천 중류의 기슭 너비9.5m,높이2.7m의 바위에 각종 도형과 글,그림이 새겨진 암석으로,아래,위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머리는 사람,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문화재청).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기마행렬도,동물,용,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6부 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능선 자락 아래에 병풍처럼 펼쳐진 장방형의 대형 암면과 북편으로 이어진 여러 개의 바위 가운데4개의 암면에 그림이 새겨져 있다.울주 천전리 각석 맞은편에 있는 급경사의 높은 암벽 자락은 이곳으로부터 약2㎞떨어진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이어진다.동남향인 천전리 각석의 대형 암면은15도 가량 앞으로 숙여져 있다.앞의 높은 산봉우리로 말미암아 암면에는 한낮에만 잠깐 볕이 든다.(울주군,울산역사문화대전). 천전리 각석 앞 물길 둘레에는100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넓고 편평한 반석이 펼쳐져 있다.반석 위에는 직경만30㎝에 이르는 백악기 공룡발자국200여 개가 남아 있다. 1970년12월24일,황수영 교수와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동국대학교 울산지구 불적 조사대’가 원효대사의 반고사 터를 조사하다가 근처에서 주민들의 안내로 울주 천전리 각석을 발견하였다.주민들은 동국대 조사대가 오기 전에도 각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3.바위에 새겨진 화랑도 이름 천전리 각석은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상단에는 동물 그림과 동심원,마름모,나선형 등 선사시대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대체로 서석의 가로 중심선 하단부에 산재한 명문들은 내용이나 서체 등으로 볼 때5~6세기 무렵에서 통일 신라 말기에 걸치는 것까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이 중에는 글자 크기나 새기는 방법 등이 판이한 것들도 섞여 있고,시기를 달리하는 내용이 중복되어 기록되기도 하여 판독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내용 또한 간략하게 인명이나 간지만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이러한 까닭에 판독 가능한 명문들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다. 221점이 분포하는데 그 가운데3점은 근현대에 제작된 이름과 연도이다. 나머지218점은 다수가 세선 긋기 형식으로 홀로 혹은 구획되어 표현되었으며,바위면 쪼기 기법으로 새긴 것도 일부 눈에 띈다.신라 시대 사람들이 남긴 대략 천 여자 가량의 명문은 도보 인물 및 기마행렬 위로 개성삼년명(開成三年銘),병술명(丙戌銘),을미명(乙未銘),계해명(癸亥銘)등이 새겨졌다(국사편찬위원회,우리역사넷). 하단의 중간 부분에 하체만 남아 있는 인물상 위로 이 암면의 중심 명문이 남아 있는데,중심 명문 가운데 먼저 새겨진 것을 원명(原銘),뒤에 새겨진 것을 추명(追銘)이라 부른다.중심 명문 주변에 신해명(辛亥銘)을 비롯한 간지명과 승려 및 화랑의 이름들,뜻이 명확하지 않은 다수의 명문이 흩어져 있다. 하단에는 신라시대의 세선화와300여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명문 중에는 문첨랑,영랑,법민랑 등 신라 화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영랑성업(戌年六月二日 永郎成業)이라는 글자는 화랑‘영랑’이 술년6월2일 업을 이루었다는 내용이다.목표를 성취했다는 것으로 짐작된다. 영랑이 화랑으로서의 수련기간을 마친 것을 기념한 각문(刻文)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이 영랑이 바로 효소왕 때의 영랑 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랑은 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詳)등과 더불어 이른바 사선(四仙)의 하나로 꼽혔으며,금강산 방면의 여행과 놀이로 이름났다.그의 족적은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문인들 사이에 회자되어‘영랑도남석행(永郎徒南石行)’이라 바위에 새겨진 삼일포(三日浦:지금의 강원도 고성군)방면을 답사,기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금강산에는 실제로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영랑재[永郎峴]’가 있었다고 한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그의 낭도 가운데는 진재(眞才),번완(繁完)등이 특히 유명하였다고 한다(『삼국유사三國遺事)』권3 탑상제4의‘백율사(栢栗寺)’조).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郎)의 무리라고 하였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영랑의 무리에는 오로지 진재(眞才)와 번완(繁完)등의 이름만 알려져 있는데,이들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는‘영랑명(永郞銘)석구(石臼)’에는 신라의 선인으로 나온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구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랑도(花郞徒)란 신라에 있었던 화랑(花郞)과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로 구성된 청소년 집단을 말한다.화랑이란‘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라는 뜻으로 국선(國仙),화판(花判),선랑(仙郎),풍월주(風月主)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화랑도는 함께 수련하고 가무를 즐기며 유람하였으며,여기에서 인재가 많이 길러지고 발탁되어 특히 삼국 통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우리역사넷). 신라 진흥왕(534~576)때 창설된 화랑도는 대개15~18세의 청소년으로 구성되었다.화랑들은 경주 남산,금장대,단석산,강릉 경포대,속초 영랑호,금강산,지리산,천전리 계곡 등과 같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면서 심신을 수양하고 단련했다.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에 새겨진 화랑의 이름 중‘법민랑(法民郞)’이 바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의 화랑 시절 이름이다.천전리 계곡이 신라 서라벌 귀족과 화랑이 즐겨 찾던 명소이자 수련지였음을 알 수 있다.문무왕은 태종무열왕의 왕자로 김유신 장군과 함께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화랑도의 수련지인‘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의 화랑도 유적을 지난3월20일, 21일 연 이틀간 답사하였다.같은 날 암각화박물관도 방문하여 암각화와 명문을 살펴보았다.첫날은12시 넘어 답사했는데,앞산에 해가 가려 암각화와 명문이 잘 보이지 않았다.문화관광해설사가 내일 아침10시 무렵에 오면 해가 비쳐 잘 보인다고 정보를 알려줘 다음 날 바로 달려갔다.계곡 건너편에는 공룡 발자국 회석이 많아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다. 암각화와 명문도 비바람에 풍화작용이 심하여 바위가 일부 떨어져 나가거나 선명하지 않아 모형을 만들어놓은 암각화박물관에 가서 자세히 보며 사진을 찍었다.글자를 판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심상도 박사, 화요칼럼,김유신 장군이 수도한 단석산 석굴

심상도 박사, 화요칼럼,김유신 장군이 수도한 단석산 석굴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화랑도의 기원 화랑도의 기원과 김유신 공이 화랑도가 된 사연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다.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三國史記 卷第四十一 列傳 第一)김유신 상(金庾信 上)조에 김유신이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를 이끌었다고 나온다.김유신 공은15세 때 화랑이 되었다.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진평왕 건복28년(서기611)신미,공의 나이17세였을 때,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말갈(靺鞨)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었다.그리하여 혼자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김유신(金庾信)조에 나이18세가 되던 임신년(서기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三國遺事 卷第三 塔像 第四)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조에 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시 영을 내려 양가의 남자 중 덕행이 있는 자를 뽑고 그 명칭을 고쳐 화랑이라 하였다.이리하여 처음으로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을 삼았으니,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였다.그래서 명주(溟州)에 비석을 세웠다. 이때부터 사람들에게 악행을 고쳐 선행을 하게 하며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순하게 하였으니,오상[五常: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육예[六藝: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삼사(三師)와 육정(六正)이 이 왕의 시대에 널리 행하여졌다. [『국사(國史)』에서는 진지왕(眞智王)대건8년 병신에 처음으로 화랑을 받들었다고 했으니,아마도 역사서에서 전하는 것이 잘못된 듯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효소왕 시대 죽지랑(孝昭王代 竹旨郞)조에‘조정의 화주(花主)’가 나온다.화주는 조정에서 화랑을 관장하는 조직이다.제32대 효소왕(孝昭王)때,죽만랑(竹曼郞)무리에 급간 득오실(得烏失)[득오곡(得烏谷)이라고도 한다.]이 있었다.그는 화랑도의 명부인『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이 있어서 날마다 출근했는데, 10여 일 동안 보이지 않았다.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명부(名簿)를‘황권(黃卷)’이라고도 한다.이 책에 이름이 올라있을 때에는 실제 화랑도 집단에 속하여 활동하였지만,이름을 지우거나 빼면 화랑도를 떠난 것으로 보여진다.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나,화랑을 중심으로 화랑도가 만들어질 때 그 무리들인 낭도(郎徒)의 명단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중악 석굴 신라 사람들은 단군 이래로 산악에 신적인 존재가 거주하는 것으로 믿는 산악숭배사상을 이어받아 영험한 산에 존재하는 산신에 대해서 제사를 지냈다.신라 오악(新羅 五嶽)은 삼국통일 이전과 이후로 달라진다.오악은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경주 주변의 산악이었으며,삼국통일 이후에는 신라의 중앙과 사방의 산악으로 확대되었다. 신라 오악은 신라시대 국가의 제사(祭祀)대상이 되었던 다섯 산악(山嶽)이다.산악에 신적인 존재가 거주한다는 믿음으로 산신에 대해서 제사를 지냈다.삼국통일 이전에는 경주 주변의 토함산,금강산,함월산,선도산,단석산이었다. 통일 이후에는 국토의 사방과 중앙에 있는 산악으로 확대되어 토함산,계룡산,지리산,태백산,팔공산으로 변하였다.통일신라를 상징하는 존재로 동·서·남·북 각 방면의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진압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신라의 국가 제사는 대사·중사·소사로 구분되었는데 신라 오악에 대한 제사는 중사에 해당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국통일 이전 신라오악은 신라 중심부인 경주평야를 둘러싸고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21,경주부 산천조에는 토함산(吐含山)을 동악,금강산(金剛山)을 북악,함월산(含月山)을 남악,선도산仙桃山)을 서악이라고 하였고『삼국사기』41권,열전1,김유신(상)의 단석산(斷石山)이 중악이었다. 그 뒤 신라 영토가 확대되고 통일을 성취한 뒤인 문무왕 말년 혹은 신문왕대에 국토의 사방과 중앙에 있는 산악으로 변화하였다.동악은 토함산,서악은 계룡산(鷄龍山),남악은 지리산(地理山),북악은 태백산(太伯山),중악은 부악[父嶽:팔공산(八公山)]이다. 신라 오악은 서악인 계룡산 하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가 소백산맥 일대와 그 동남쪽에 있는 산악들로,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되어 있는 신라통일기의 국가제사에서 중사에 편입되었다.오악에 대한 제사는 각 산에 거주한다고 생각한 산신에 대한 제사였다. 3.경주 단석산 천주사 김유신 장군 추모제 ‘제71회 김유신 장군 추모제’가2023년10월21일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 단석산 천주사에서 열렸다.대한불교 관음종 제2교육도량 경주시 단석산 천주사는 천주사 경내에서‘제71회 김유신 장군 추모제’를 열었다.추모제는 신라 삼국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의 호국 의지를 받들고,화랑의 정신과 기상을 이어가기 위해 개최되었다. 추모제에는 홍파 대한불교관음종9세 종정을 비롯해 도선 천주사 주지,주낙영 경주시장,김석기 국민의힘 국회의원,이철우 경주시의회 의장,박승직 경북도의원,김소현(단석산메아리 대외협력위원장)경주시의원,불자 등100여 명이 참석했다(한국일보, 2023, 10.22). 추모제는 이루리(2021미스채선)아나운서의 사회로1부와2부로 나눠 진행됐다. 1부 추도법회에서는 화랑낭도 김유신 장군 위패 이운의식을 시작으로 명종5타,삼법공양,삼귀의례,반야심경 봉독,추모제 경과보고,헌화,축사,발원문,청법가,사홍서원,관음종 총무원장의 법문이 이어졌다. 2부에서는 관음무,가야금병창,태평무,스포츠공연,초대가수 공연 등 문화행사가 열렸다. 도선 천주사 주지 스님은“김유신 장군께서6년 동안 수행하신 불선암까지 등산로 공사와 불선바위 동굴 옹달샘 보존은 단석산 김유신 장군의 성역화 사업에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다.”며“2025년 에이펙(APEC)정상회의를 경주에 유치,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모두 함께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그날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손잡고 동행하자.”며 합장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축전을 통해“단석산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염원한 도량으로 수행의 흔적과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라며 김유신 장군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다같이 지역 역사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홍보해 지방 정주시대 실현에 함께 노력하자.”고 언급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화랑정신이 살아 숨쉬는 단석산 천주사에서 김유신 추모제가 열린 것에 대해서 매우 뜻깊고,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한다.”며“찬란했던 신라 왕조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고 가장 한국적인 전통 문화유산을 갖추고 있는 경주에서2025 APEC정상회의가 유치될 수 있도록100만 서명 운동에 동참을 부탁한다.”고 축사를 했다. 4.김유신 공이 수도한 불선바위 등산로 정비 경북 경주 단석산(827m)천주사와 김유신 동굴을 잇는 등산로가 새로 정비했다.경주시는 건천읍 단석산 천주사와 김유신 동굴(추정)을 잇는 등산로1.5㎞구간 정비 공사를2023년11월20일 마무리했다(매일신문, 2023. 11.20). 단석산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과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알려져 있다.진달래 군락지 등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산세가 웅장해 등산객이 많이 찾는다.경주시는 사업비3억 원을 들여2023년6월부터 단석산 등산로 정비 사업을 진행했다. 등산로 입구는 침목계단으로 꾸몄고,급경사지엔 기존 낡은 계단을 철거한 뒤 방부목 데크와 울타리를 설치했다.그 밖의 구간엔 불규칙한 노면 정리를 통해 안전사고 예방과 이용객 편의를 꾀했다고 경주시에서 설명했다.주낙영 경주시장은“경주를 찾는 등산객이 안전하고 편안한 산행을 즐길 수 있도록 등산로 유지관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언급했다. 5.김유신 공 수도처 답사 소감 필자는 지난4월8일에 천주사와 김유신 공의 화랑도 시절 수도장인 불선바위를 답사했으며 내친 김에 단석산(827.2m)정상까지 다녀왔다.불선바위는 불선암으로도 불린다.불선바위에는 옆으로 길쭉한 석굴에 석간수가 있어 기도하기에 알맞았다. 천주사에는 김유신 장군 스토리텔링 안내판이 있었으며,좌선을 했다는 커다란 바위도 삼성각 옆에 있었다.천주사가 있는 방내리는 꽃이 많아 꽃안,방내리[芳內里:꽃다울 방(芳)]라 불렸다고 전해진다.꽃다운 화랑도가 수련장인 단석산을 오르내릴 때 방내리를 거쳐갔을 것이다. 필자가 답사하면서 방내리를 살펴보니 복숭아 과수원이 많아 한창 복숭아꽃이 만발하였고,벚꽃도 피어 아름다웠다.한편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마을로 방내리(房內里)라 하였다.방내리 지명을 꽃다운 화랑도,꽃이 많은 동네와 연관지어 꽃안 또는 방내리라고 부른 것은 적절한 지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천주사 경내도 복숭아꽃이 화려하게 피었고,자두나무꽃은 지고 있었다. 지난2022년4월12일 신선사를 거쳐 단석산 정상,송곳바위 등을 둘러보았는데, 2년 만에 또다시 단석산을 찾았다.기둥바위는 천주암(天柱巖)으로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다.천주사에서 단석산 정상까지3.3km로 원점회귀하는데4시간30분 정도 걸렸다.오후에 답사하며 기온이 올라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등산 시작할 때는 맑은 날씨였으나 저녁이 되면서 날씨가 흐렸다. 천주사에서 김유신 공 수도처인 불선바위까지는1.1km였으며,가까운 곳에 기둥바위가 있었다.등산로는 계단 목제 데크 등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오르막이 심했다.단석산 정상가는 도중에 송곳바위가 있었다.낮은 곳은 진달래꽃이 만발했는데 단석산 정상 가까운 곳은 이제 막 피기 시작하였다.

중앙동, ‘동산장성 철쭉제’ 개최 준비 만전

중앙동, ‘동산장성 철쭉제’ 개최 준비 만전

- 오는 4월 20일 북부산성 정상 철쭉에 물들다 - 양산시 중앙동행정복지센터(동장 김창준)에서 올해 중앙동 동산장성 철쭉제가 오는 4월 20일에 개최한다고 밝혔다. 2016년 제1회 철쭉제를 시작으로 올해 7회째를 앞두고 있는 ‘동산장성 철쭉제’행사는 동산장성 철쭉군락지 인근에서 이루어지는 산신제를 통해 지역사회의 번영과 건강, 행복과 풍년을 기원하고, 중앙동 주민자치회를 비롯한 지역주민 200여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중앙동은 지난 2일 계원사를 시작으로 북부장성까지의 산행길과 체육시설 등을 정비하고 동선 파악 등 안전한 축제 진행을 위해 등산로를 꼼꼼히 살폈다. 동산장성 철쭉군락지는 매년 봄 산정상을 진분홍빛의 화원으로 꾸며져 보는 이의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곳으로, 도심 인근 산에 위치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갈 수 있고 양산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산 명소이다. 김창준 중앙동장은 “중앙동행정복지센터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철쭉군락지를 조성하여 명소를 만들고 산신제도 거행하는 것으로서 타 지역의 주요 벤치마킹 사례가 되고있다”며 “오는 20일 동산장성 철쭉제에 많은 분들이 동행하여 철쭉과 함께 봄을 만끽하시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동산장성 철쭉제’ 개최 준비 만전

동산장성 철쭉제’ 개최 준비 만전

- 오는 4월 20일 북부산성 정상 철쭉에 물들다 - 양산시 중앙동행정복지센터(동장 김창준)에서 올해 중앙동 동산장성 철쭉제가 오는 4월 20일에 개최한다고 밝혔다. 2016년 제1회 철쭉제를 시작으로 올해 7회째를 앞두고 있는 ‘동산장성 철쭉제’행사는 동산장성 철쭉군락지 인근에서 이루어지는 산신제를 통해 지역사회의 번영과 건강, 행복과 풍년을 기원하고, 중앙동 주민자치회를 비롯한 지역주민 200여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중앙동은 지난 2일 계원사를 시작으로 북부장성까지의 산행길과 체육시설 등을 정비하고 동선 파악 등 안전한 축제 진행을 위해 등산로를 꼼꼼히 살폈다. 동산장성 철쭉군락지는 매년 봄 산정상을 진분홍빛의 화원으로 꾸며져 보는 이의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곳으로, 도심 인근 산에 위치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갈 수 있고 양산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산 명소이다. 김창준 중앙동장은 “중앙동행정복지센터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철쭉군락지를 조성하여 명소를 만들고 산신제도 거행하는 것으로서 타 지역의 주요 벤치마킹 사례가 되고있다”며 “오는 20일 동산장성 철쭉제에 많은 분들이 동행하여 철쭉과 함께 봄을 만끽하시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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